※ 이 글은 NSW 기준입니다. VIC·QLD·WA 등 다른 주는 뺑소니 사고 처리 방식이 다릅니다.
안녕하세요. 개인상해 전문 로펌 리틀즈의 이려진 변호사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교통사고 가운데서도 유난히 억울한 경우, 나를 친 차가 그대로 가 버린 뺑소니 사고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밤길에 길을 건너다 차에 부딪혔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차는 이미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고 없습니다. 다친 것도 서러운데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니,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동안 이런 생각이 꼬리를 뭅니다.
"상대를 모르는데 누구한테 치료비를 달라고 하지?"
"번호판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데, 이러면 끝 아닌가?"
"경찰이 범인을 잡을 때까지 마냥 기다려야 하나?"
기다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NSW에는 이런 경우를 위해 Nominal Defendant(명목상 피고)라는 제도가 있는데요, 가해 차량을 확인할 수 없거나 보험이 없는 차량에 다친 경우에 법이 이름뿐인 피고를 대신 세워 두어서 피해자가 치료와 배상을 청구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Motor Accident Injuries Act 2017 s 2.29, s 2.30). NSW에서는 SIRA가 이 Nominal Defendant 역할을 맡고, 실제 청구 처리는 CTP 보험사가 대신합니다. 치료비와 소득 지원 같은 법정 급여도, 손해배상 청구도 일반 교통사고와 크게 다르지 않게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이름에 '피고'가 들어가서 처음 들으시면 당장 법정에 서야 하는 것처럼 들리는데요, 쉽게 말해 달아난 운전자의 빈자리를 SIRA가 대신 채워 준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니 범인이 잡히기를 기다리며 치료를 미루실 필요가 없고, 다친 몸부터 챙기시면서 청구를 차근차근 준비하시면 됩니다.
차를 '찾았느냐'보다 '찾으려 했느냐'
이 제도에서 가장 중요한 요건은 가해 차량을 확인하기 위한 조사(due inquiry and search)를 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담 중 흔히 듣는 질문이 바로 "끝내 차를 못 찾으면 그걸로 끝인가요?"인데요, 오해하시기 쉽지만 차를 꼭 찾아내라는 뜻은 아닙니다. 찾기 위해 할 수 있는 조사를 했는데도 확인되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 주시면 되고, 그래서 사고 직후에 하시는 일 하나하나가 그대로 이 요건의 증거가 됩니다. 보험사는 이 요건을 청구인에게 서면으로 안내해야 하고, 조사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거절하려면 법에서 정한 기간 안에 해야 합니다.
가장 먼저는 경찰 신고입니다. 사건 번호(Event Number)를 받아 두시고, 가능하면 경찰 보고서 사본도 받아 보관해 두세요. 경찰이 현장에 오지 않았다면 사고 후 28일 안에 신고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다음은 기억이 흐려지기 전에 적어 두는 일인데요, 차종과 색상, 번호판 일부, 달아난 방향, 운전자 인상까지 기억나는 만큼 자세히 적어 두시면 됩니다. 상담에서 차 색깔을 여쭤보면 "흰색이었나, 은색이었나… SUV였던 것 같기도 하고요" 하시는 분이 많은데, 호주 도로의 차 절반이 흰색 SUV처럼 보이는 건 제 눈에도 마찬가지라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래서 작은 조각이라도 떠오를 때마다 휴대폰 메모장에 바로 적어 두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영상은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목격자가 있었다면 진술과 연락처를 받아 두시고, 없었다면 지역 커뮤니티나 SNS 공지로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라면 동네 곳곳에 현수막을 붙였겠지만, 호주에서는 동네 커뮤니티 게시판과 SNS가 그 현수막 노릇을 해 줍니다. 주변 상점이나 건물, 지나가던 차량의 CCTV와 블랙박스 영상은 시간이 지나면 지워지는 경우가 많으니 보존을 요청해 두시고, 언제 누구에게 요청했는지도 함께 적어 두세요. 사고 지점과 도로 상태, 신호등, 바닥에 떨어진 파편도 사진으로 남겨 두시면 좋습니다. 이렇게 쌓인 기록이 곧 "나는 차를 찾으려고 할 만큼 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진료 기록과 병원 영수증, 급여명세서, 병가 기록, 고용주 확인서, 사업자라면 세무 자료도 함께 모아 두시면 나중에 소득 지원과 손해배상을 청구할 때 요긴하게 쓰입니다.
무엇을, 언제까지 청구하나요
청구하실 수 있는 것은 일반 교통사고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법정 급여로는 치료비와 재활비, 그리고 일을 못 한 동안의 소득 지원을 받으시는데, 연조직 손상처럼 경미한 부상, 이른바 Threshold Injury라면 최대 52주까지이고, 그 밖의 부상은 소득 지원이 원칙적으로 최대 104주이며 손해배상 청구가 진행 중이면 더 길어질 수 있습니다. Threshold Injury가 아닌 부상이라면 과거와 미래의 소득 손실을 손해배상으로 청구하실 수 있고, 영구 손상 정도(WPI)가 10%를 넘으면 고통과 삶의 질 저하 같은 비금전적 손해도 청구할 수 있습니다. 치료비는 손해배상이 아니라 법정 급여 쪽에서 지원된다는 점만 기억해 두시면 헷갈리지 않으십니다. 보험사에서 오는 영어 편지에 두 단어가 번갈아 나오더라도, 어느 주머니에서 나오는 돈인지만 구분하시면 절반은 이해하신 셈입니다.
기한은 일반 사고와 같아서, 법정 급여는 사고 후 3개월 안에, 손해배상은 사고 후 3년 안에 청구하는 것이 원칙이고, 사고 시점부터 소득 지원을 받으시려면 28일 안에 청구해 두시는 것이 안전합니다. 늦어진 데 합당한 설명이 있으면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있지만, 예외에 기대지 않으시는 편이 좋습니다. 안타깝게도 사망 사고라면 장례비는 법정 급여로, 고인에게 부양받던 가족은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뺑소니 사고는 증거를 모으는 초기 몇 주가 특히 중요한데, 다친 몸으로 경찰 신고에 목격자 수소문, 영상 보존 요청까지 혼자 챙기시기는 정말 쉽지 않습니다. 달아난 사람은 달아났더라도, 남은 분의 권리까지 함께 달아나는 것은 아닙니다.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하시면 됩니다. 경찰 사건 번호와 진단서, 보험사에서 온 편지를 사진으로 보내 주시면 지금까지 해 두신 것으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무엇을 더 챙기면 좋을지 제가 먼저 살펴 드리겠습니다. 무엇보다 몸부터 잘 돌보시고 하루빨리 회복하시길 바라며, 한국어로 편하게 연락 주세요.
자주 묻는 질문
뺑소니 사고 CCTV 영상은 어떻게 확보하나요?
주변 상점, 건물, 지나가던 차량에 영상 보존을 요청하고, 언제 누구에게 요청했는지 기록해 두세요. 이런 영상은 시간이 지나면 지워지는 경우가 많아 사고 직후에 움직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영상 보존 요청처럼 차량을 찾으려고 한 노력 하나하나가 Nominal Defendant 청구에서 가해 차량을 확인하기 위한 조사(due inquiry and search) 요건의 증거가 됩니다.
뺑소니 가해 차량을 끝내 못 찾으면 청구가 안 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조사 요건은 차량을 꼭 찾아내야 한다는 뜻이 아니고, 찾기 위해 할 수 있는 조사를 했는데도 확인되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주면 됩니다. 경찰 신고, 목격자 수소문, 영상 보존 요청 기록을 모아 두세요. 또 보험사가 조사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청구를 거절하려면 법에서 정한 기간 안에 해야 합니다.
뺑소니 사고로 가족이 사망했을 때도 청구할 수 있나요?
청구할 수 있는 항목이 있습니다. 장례비는 법정 급여로 청구할 수 있고, 고인에게 부양받던 가족은 손해배상(compensation to relatives)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가해 차량을 확인할 수 없는 뺑소니라도 Nominal Defendant 제도를 통해 청구할 수 있으니, 경찰 신고와 차량을 찾으려 한 기록을 함께 챙기고 청구 기한을 먼저 확인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