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개인상해 전문 로펌 리틀즈의 이려진 변호사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가장 기본이면서도 막상 닥치면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 것, 교통사고가 난 바로 그 자리에서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를 순서대로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넓은 호주 땅에서 자동차는 생활필수품이고 운전은 거의 생존 기술에 가까운데요, 그만큼 사고도 운전 실력이나 습관과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차가 멈추고 나면 머릿속이 하얘지고, 이런 생각들이 한꺼번에 밀려옵니다.
"차를 빼야 하나, 그대로 둬야 하나?"
"상대방이 영어로 막 뭐라고 하는데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보험도 없고 비자도 임시인데, 나는 어차피 안 되는 거 아닌가?"
호주 생활을 막 시작한 유학생이나 워홀러분들은 물론이고, 오래 사신 교민분들도 사고가 처음이라면 마찬가지이실 겁니다. 다만 교통사고에 관한 법과 제도는 주마다 달라서, 오늘 말씀드리는 것은 여러 주에 공통되는 대처 요령이고 주별로 차이가 큰 부분은 따로 짚어 드리겠습니다.
현장에서는 안전, 사람, 그리고 기록 순서로
사고가 나면 차를 안전한 곳에 세우고 비상등을 켜서 뒤따르는 차들에 알려 주세요. 비 오는 날이나 밤에는 시야가 나빠 2차 사고로 이어지기 쉽기 때문에 경고 삼각대 같은 비상 표지를 차에 두시면 도움이 되는데, 이것도 본인의 안전이 확보된 다음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가벼워 보여도 현장을 그냥 떠나시면 안 되는데요, 사고 후 정차하고 인적 사항을 알릴 의무가 각 주 법에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다음은 사람입니다. 내가 다쳤는지 먼저 보고, 움직일 수 있다면 상대 운전자와 동승자, 보행자나 자전거 이용자의 상태를 살핍니다. 부상자가 차도 위처럼 위험한 곳에 있는 게 아니라면 무리하게 옮기지 않으시는 편이 좋은데, 옮기다가 부상이 더 심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친 사람이 있으면 000에 전화해 구급차와 경찰을 부르시고, 경미한 사고라도 어지럽거나 머리를 부딪쳤다면 병원에서 진단을 받아 보세요.
큰 부상이 없다면 상대 운전자와 정보를 주고받으시면 되는데요, 이름과 전화번호, 주소, 번호판과 차종·색상, 보험사, 그리고 목격자 연락처까지 받아 두시고, 경찰이 왔다면 담당 경찰관 이름과 소속 경찰서, 사건 번호도 함께 적어 두세요. 사고 순간에는 경황이 없어서, 나중에 기억에만 기대다 보면 상대방 진술과 엇갈려 고생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안전이 확보되었다면 양쪽 차의 손상 부위와 번호판, 차가 멈춘 위치, 신호등과 스키드마크, 날씨와 도로 상태까지 여러 각도로 찍어 두시고, 블랙박스 영상은 덮어쓰기 전에 바로 따로 저장해 두셔야 합니다. 한국 운전자분들은 블랙박스 설치에는 누구보다 부지런하신데, 정작 사고 난 날 그 영상을 빼 두는 것을 잊으셔서 다음 날 출근길 영상이 그 위를 덮어 버리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습니다.
경찰 신고와 보험 신고는 주마다 다릅니다
경찰이 현장에 오지 않았더라도 신고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NSW에서는 누군가 다친 사고라면 원칙적으로 사고 후 24시간 안에 경찰에 알려야 하고, CTP 청구를 하시려면 경찰이 현장에 오지 않은 사고는 사고 후 28일 안에 신고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VIC는 사람이 다친 사고에서 현장에 경찰이 없으면 운전자가 가능한 한 빨리 가까운 경찰서에 직접 신고해야 하고, TAC는 경찰에 신고되지 않은 사고에 대해 원칙적으로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WA도 사람이 다친 사고는 운전자가 지체 없이 경찰에 신고하게 되어 있습니다. 상대 차가 달아났거나 정보 교환을 거부한 경우에도 신고해 두시고, 신고한 경찰서와 날짜, 사건 번호를 적어 두시면 나중에 청구할 때 큰 도움이 됩니다.
보험도 한국과 많이 다른데요, 한국처럼 보험사 직원이 와서 대인과 대물을 한꺼번에 정리해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차 수리는 내가 가입한 자동차 보험에 가능한 한 빨리 알리고, 사람이 다친 부분은 차량 등록 때 함께 가입되는 강제 대인 보험(Compulsory Third Party), 그러니까 CTP 제도를 통해 따로 청구합니다. NSW에서는 관련 차량의 CTP 보험사에 청구하고 치료비와 소득 지원은 과실과 관계없이 청구할 수 있으며, VIC에서는 TAC가 과실과 관계없이 지원하되 사고가 경찰에 신고되어 있어야 하고, WA는 ICWA가 맡는데 다른 운전자의 과실이 있어야 합니다. CTP는 비자 종류와 관계없이 적용될 수 있고, 대물 보험이 없거나 Medicare 대상이 아니어도, 가해 차량의 동승자였어도 청구가 가능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니 앞에서 떠올리신 "나는 어차피 안 되겠지"는 혼자 결론 내리기 전에 확인부터 해 보셔도 늦지 않습니다.
사고 뒤에 흔히 하는 실수 세 가지
첫째는 아픈 걸 참고 진료를 미루는 것입니다. 교통사고 후유증은 며칠에서 몇 달 뒤에 나타나기도 하는데, 사고 직후 진료 기록이 없으면 나중에 증상이 나타났을 때 사고와의 관련성을 보여 주기가 어려워집니다.
둘째는 귀국하면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상담 중 흔히 듣는 질문이 바로 "한국 들어가면 이제 청구는 못 하는 거죠?"인데요, 청구 기한이 남아 있다면 한국에서도 호주 제도를 상대로 절차를 진행할 수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만 기한은 주마다 달라서, NSW는 법정 급여 청구가 사고 후 3개월, 손해배상 청구는 사고 후 3년이 원칙이고, VIC는 TAC 청구가 사고 후 1년, 공통법 소송은 부상일부터 6년입니다. 예외와 연장 규정도 있지만 요건이 까다로우니, 귀국을 앞두고 계시다면 짐 싸기 전에 청구 절차부터 시작해 두세요.
셋째는 현장에서 너무 쉽게 "I'm sorry"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국 사람에게 "죄송합니다"는 거의 인사말에 가까운데, 상대방이 이를 과실 인정으로 받아들여 보험사에 그렇게 보고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의는 지키시되 사고 경위가 확인되기 전에는 "제 잘못입니다" 같은 말은 삼가세요. 상대방에게 괜찮으시냐고 묻는 것과 책임을 인정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병원 치료가 필요할 만큼 다치셨거나, 과실을 두고 상대방이나 보험사와 다툼이 생겼거나, 보험사가 청구를 거절하거나 지원을 끊었거나, 귀국 날짜가 다가와 절차를 어떻게 이어 갈지 걱정되신다면 그때가 변호사와 이야기해 보실 때입니다.
호주의 넓은 길 위에서 늘 안전 운전하시고 좋은 곳만 찾아다니시길 바랍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오늘 말씀드린 순서를 휴대전화 메모에 저장해 두시면, 그 순간에 하나씩 따라가실 수 있습니다. 이미 사고가 나셨다면 현장 사진과 상대방 정보, 보험사에서 온 편지를 찍어 보내 주세요. 어느 기한이 아직 남아 있고 무엇부터 하시면 되는지 제가 한국어로 먼저 짚어 드리겠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교통사고 현장에서 "I'm sorry"라고 하면 과실을 인정한 게 되나요?
과실 인정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으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당황한 나머지 습관처럼 "I'm sorry"라고 말했는데, 상대방이 이를 과실 인정으로 받아들여 보험사에 그렇게 보고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의를 지키되, 사고 경위가 확인되기 전에는 "제 잘못입니다" 같은 말을 삼가세요. 상대방의 안부를 묻는 것과 책임을 인정하는 것은 다릅니다.
호주에서 교통사고 후 한국으로 귀국하면 배상 청구는 못 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청구 기한이 남아 있다면 한국에서도 호주 보험 제도를 상대로 절차를 진행할 수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만 주마다 기한이 있어서 무작정 기다리면 안 되고, 기한의 예외와 연장 규정은 요건이 까다롭습니다. 귀국을 앞두고 있다면 떠나기 전에 청구 절차를 시작해 두시는 것이 좋습니다.
경찰이 현장에 안 왔는데 교통사고를 따로 신고해야 하나요?
경찰이 현장에 오지 않았더라도 신고해야 하는 경우가 있고, 기준은 주마다 다릅니다. 예를 들어 NSW에서 CTP 청구를 하려면 경찰이 현장에 오지 않은 사고는 사고 후 28일 이내에 신고해야 하고, VIC의 TAC는 경찰에 신고되지 않은 사고에 대해 원칙적으로 배상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신고한 경찰서, 날짜, 사건 번호를 기록해 두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