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NSW와 VIC 기준입니다. 다른 주는 제도가 다릅니다.
안녕하세요. 개인상해 전문 로펌 리틀즈의 이려진 변호사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사고 현장에서 상대 운전자가 건네는 그 익숙한 한마디, "보험 처리하지 말고 그냥 우리끼리 정리하자"는 말을 들었을 때 무엇을 챙겨 두시면 좋은지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범퍼가 살짝 찌그러진 정도인데 상대 운전자가 "보험 처리하면 서로 번거로우니 현금으로 정리하시죠" 하면, 한국에서도 많이 듣던 말이라 고개가 먼저 끄덕여집니다. 한국에서는 이럴 때 계좌번호를 문자로 주고받고 "수리비 나오면 연락 주세요"로 끝나는 장면이 익숙한데요,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 그날 밤부터 어깨가 결리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이쯤 되면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떠오르실 겁니다.
"합의하자고 해 놓고 이제 와서 아프다고 하면 내가 말을 바꾸는 건가?"
"그 사람 전화번호만 받았는데, 이걸로 되나?"
"경찰은 안 불렀는데 지금이라도 신고해야 하나?"
현장에서 주고받을 것은 법이 정해 두었습니다
NSW 도로교통규칙(Road Rules 2014)은 사고에 관련된 운전자가 현장에 멈춰서 상대 운전자와 다친 사람, 재산 소유자에게 자기 이름과 주소, 차량 소유자, 등록번호를 알리도록 정하고 있습니다. 누가 다쳤다면 경찰에도 알리도록 되어 있고, 가능한 한 빨리, 예외적인 사정이 없으면 24시간 안입니다.
그러니 "합의하자"는 말과 상관없이 이 정보 교환은 서로에게 정해진 의무인데요, 상대를 의심해서 묻는 것이 아니니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상대가 이름이나 등록번호를 알려 주기를 꺼린다면 그 자체로 경찰 신고가 필요한 신호로 보셔도 됩니다. 차량 번호판과 충격 부위, 도로 상황은 휴대폰으로 사진을 남기시고, 지나가다 멈춰 선 목격자가 있다면 연락처도 받아 두세요. 그 자리에서 받지 않으면 다시 찾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전화번호 하나만 받아 두셨다가 나중에 그 번호가 꺼져 있는 경우를 저는 생각보다 자주 봅니다.
말로 한 합의가 길을 막지는 않지만
상담 중 흔히 듣는 질문이 바로 "합의했으니 이제 다친 것도 못 청구하는 거죠?"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상대가 말하는 '보험'은 대개 차 수리를 위한 자동차 보험이고, 사람이 다친 것은 CTP라는 별도 제도로 다루는데요, NSW에서 부상 청구의 상대는 운전자 개인이 아니라 그 차량의 보험사입니다. 그래서 현장에서 말로 "보험 처리하지 말자"고 했다는 사실만으로 다친 사람이 법정 급여를 청구할 길이 닫히지는 않습니다. 현금 봉투로 정리한 것은 범퍼 이야기였지, 내 어깨까지 팔아넘긴 계약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정말 어려워지는 부분은 증거입니다. 그 자리에서는 아프지 않아 헤어졌다가 며칠 뒤 통증이 시작되면, 사고가 있었다는 사실과 상대가 누구인지부터 증명해야 합니다. 블랙박스나 CCTV 영상은 시간이 지나면 덮어쓰여 지워질 수 있으니, 내 차 영상은 바로 따로 저장해 두시는 것이 좋습니다. 막상 청구서에 사고 경위를 적으려고 앉으면 기억나는 것은 상대 차가 흰색 SUV였다는 것과 운전자가 아주 친절했다는 것 정도인 경우가 많은데요, 친절했던 인상은 아쉽게도 청구서 어느 칸에도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현장에서 찍어 둔 번호판 사진 한 장, 상대와 주고받은 문자 한 줄이 나중에는 기억보다 훨씬 정확한 증거가 됩니다. 상대가 문자로 "제가 뒤에서 박아서 죄송합니다" 하고 보냈다면 그 화면도 지우지 말고 캡처해 두세요.
조심하셔야 할 장면이 하나 더 있습니다. 현금을 건네면서 "더 이상 청구하지 않겠다"는 문서에 서명해 달라고 하는 경우인데요, 이런 문서에 서명했다면 그 효력은 문구와 사정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 자리의 미안한 마음이나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에 서명하시고, 나중에 몸이 아파 후회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내용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서명을 미뤄 두셔도 전혀 실례가 아니고, 펜을 드시기 전에 사진 한 장 찍어 저에게 보내 주시면 무슨 내용인지 먼저 봐 드릴 수 있습니다.
경찰 신고, NSW와 VIC는 무게가 다릅니다
NSW에서는 경찰이 현장에 오지 않았다면 사고 후 28일 안에 경찰에 신고하고, 그때 받은 사건 번호를 보험사에 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신고가 늦거나 없으면 보험사는 현장 사진, 목격자 진술, 블랙박스 같은 다른 자료를 요구하고, 그것도 없으면 사유를 적은 법정 선언서를 내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NSW는 신고가 없으면 다른 자료로 사고를 보여 드리는 구조인데요, VIC는 훨씬 단호해서 경찰에 신고하지 않으면 TAC에서 받을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사정에 따라 TAC가 면제할 수는 있지만, 기대고 계시기에는 불안한 길입니다. 두 주 모두 "경미한 사고니까 경찰은 필요 없다"는 상대의 말을 그대로 따르시기보다, 다친 사람이 있거나 생길 수 있다면 신고해 두시는 편이 안전합니다.
그러면 이미 헤어진 뒤 몸이 아파 오기 시작했다면 어떻게 하시면 될까요. 현장에서 합의하고 헤어지셨더라도 통증이 시작되면 바로 진료를 받으시고, 사고 날짜와 경위를 의사에게 함께 말씀해 주세요. NSW에서는 증상이 늦게 나타나도 법정 급여 기한이 사고일부터 흐르는데요, 28일 안에 청구하셔야 사고 다음 날부터 소득 지원을 받으실 수 있고, 청구 기한은 사고 후 3개월입니다. 손해배상 청구가 늦어졌다면 증상이 늦게 나타난 사정을 설명에 쓰실 수 있습니다. VIC는 부상이 늦게 나타났다면 그때부터 1년 안에 TAC에 청구하실 수 있습니다. 이때 현장에서 받아 둔 상대 정보와 사진이 청구서에 사고 경위를 적는 바탕이 됩니다.
상대가 웃으면서 "서로 좋게 끝내자"고 하면 거절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래도 정보를 받고 사진을 찍는 것은 상대를 못 믿어서가 아니라 법이 서로에게 정해 둔 일이고, 이미 합의하고 헤어지셨더라도 늦었다고 단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호주의 도로에서는 범퍼 자국 정도로만 끝나는 날이 대부분이길 바랍니다. 혹시 그날 이후 몸이 아파 오기 시작했다면, 현장에서 받은 상대 연락처나 번호판 사진, 혹시 서명하신 종이가 있다면 그 사진까지 보내 주세요. 지금 청구할 길이 남아 있는지, 경찰 신고는 어떻게 하시면 되는지 제가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한국어로 편하게 연락 주세요.
자주 묻는 질문
교통사고 현장에서 합의했는데 나중에 아프면 청구할 수 있나요?
말로 한 현장 합의만으로 부상 청구의 길이 닫히지는 않습니다. NSW에서 부상 청구의 상대는 그 차량의 보험사입니다(MAIA s 3.2). 다만 문서에 서명했다면 그 효력은 문구와 사정에 따라 다릅니다. 통증이 시작되면 바로 진료를 받으시고 기한(s 6.13)을 확인해 두세요. VIC라면 경찰 신고가 되어 있는지도 함께 확인해 두시는 편이 좋습니다(TAA s 39).
경미한 접촉 사고도 경찰에 신고해야 하나요?
NSW에서는 누가 다쳤다면 경찰에 알리도록 되어 있습니다(Road Rules 2014 r 287). 경찰이 현장에 오지 않았다면 사고 후 28일 안에 신고하고 사건 번호를 보험사에 내도록 정하고 있습니다(Guidelines cl 4.11). 처음에는 다친 사람이 없어 보여도 나중에 통증이 생길 수 있으니 신고해 두시는 편이 안전합니다.
호주에서 교통사고 경찰 신고를 안 하면 어떻게 되나요?
VIC에서는 경찰에 신고하지 않으면 TAC 배상을 받을 수 없고, 사정에 따라 TAC가 면제할 수 있습니다(TAA s 39). NSW에서는 사건 번호가 없으면 보험사가 현장 사진·목격자 진술·블랙박스 같은 다른 자료를 요구하고, 그것도 없으면 사유를 적은 법정 선언서를 내야 합니다(Guidelines cl 4.12-4.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