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NSW 기준입니다.
안녕하세요. 개인상해 전문 로펌 리틀즈의 이려진 변호사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교통사고 상담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어, '과실'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국에서는 사고가 나면 차에서 내리자마자 "이거 몇 대 몇이에요?"부터 따지는 것이 거의 국민 상식처럼 되어 있는데요, 그 습관이 몸에 밴 채로 호주에서 사고를 겪으시면 보험사 직원의 전화 한 통에 마음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교차로에서 우회전하다 맞은편 직진 차와 부딪혔는데 며칠 뒤 "고객님 과실이 크다"는 말을 들으면, 머릿속이 이렇게 바빠지기 마련입니다.
"내 잘못이 크면 치료비도 못 받는 거야?"
"그 비율은 대체 누가 정하는 건데?"
"전화로 그렇다고 했으니 이제 뒤집을 수도 없겠지?"
과실이 커도 법정 급여는 나옵니다
반가운 이야기부터 드리겠습니다. NSW의 법정 급여(statutory benefits), 그러니까 치료비와 소득 지원은 과실과 관계없이, 심지어 본인 잘못으로 난 사고여도 지급됩니다. 과실 다툼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실 이유가 전혀 없다는 뜻인데요, 오히려 기다리시다가 기한을 놓치는 게 더 큰 문제입니다. 법정 급여 청구는 사고 후 3개월 안, 사고 다음 날부터 소득 지원을 받으시려면 28일 안에 하도록 되어 있으니, 과실 이야기와는 따로 이 날짜부터 달력에 적어 두세요.
그렇다고 과실이 아무 상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본인 과실이 61%를 넘으면 소득 지원과 치료비가 사고 후 52주까지로 끊기고(치료비 제한은 사고 당시 16세를 넘은 분에게 적용됩니다), 52주 이후의 소득 지원은 본인 과실 비율만큼 줄어들며, 손해배상에서도 과실만큼 깎입니다. 법이 아예 과실을 인정하도록 정해 둔 경우도 있는데요, 음주나 약물 운전으로 유죄가 된 경우, 운전자가 술이나 약물에 취한 걸 알았거나 알 수 있었는데도 스스로 올라탄 성인 동승자, 안전벨트를 매지 않은 성인, 헬멧을 쓰지 않은 경우가 그렇습니다. 다만 동승을 거절할 수 없었던 사정이 있었다면 동승자 항목은 예외입니다. 그리고 그 비율은 보험사 혼자 정하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끼리 합의하거나, 합의가 안 되면 PIC(Personal Injury Commission)가 정합니다.
과실이 의외의 곳에서 얼굴을 내미는 경우도 하나 있습니다. 차량이 두 대 이상 얽힌 사고라면 법정 급여는 사고에 가장 크게 기여한 차량의 보험사에 청구하게 되어 있어서, 과실 판단이 곧 '어느 보험사에 서류를 내느냐'와도 이어지는데요, 보험사끼리 서로 상대 차 쪽이라고 미루는 모습을 보면 탁구 경기를 구경하는 기분이 들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어느 보험사인지를 두고 다툼이 생기면 그것도 PIC가 정합니다. 손해배상에서는 누구의 과실도 아닌 사고도 차량 소유자나 운전자의 과실로 간주되는 규정이 있지만, 사고를 일으킨 운전자 본인은 이 규정으로 손해배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과실은 기억이 아니라 자료로 따집니다
과실을 볼 때는 사고 유형마다 살피는 것이 조금씩 다릅니다. 교차로라면 신호와 양보·정지 표지, 회전 차와 직진 차의 진행 순서를, 차선 변경이라면 방향지시등과 앞뒤 간격과 사각지대 확인을, 로터리라면 누가 먼저 안에 있었는지와 진입 전에 양보했는지를, 주차장이라면 통로를 달리던 차와 칸에서 나오던 차, 후진 여부와 바닥 화살표를 봅니다. 사고 유형별로 비율이 정해진 표가 있는 것은 아니라서 같은 교차로 사고라도 결과는 사실관계에 따라 달라집니다. 로터리 사고 상담을 하다 보면 신기하게도 양쪽 운전자 모두 자기가 먼저 로터리 안에 있었다고 기억하십니다. 두 분 다 거짓말을 하시는 게 아니라 사람 기억이 원래 그렇게 너그러운 겁니다. 그래서 결국 말을 해 주는 것은 사진과 영상입니다. 주말 쇼핑센터 주차장 사고는 또 다른 의미로 흥미로운데요, 한쪽은 칸에서 천천히 나오고 있었고 다른 쪽은 통로를 천천히 달리고 있었다고 하시니, 듣다 보면 두 차 모두 거의 서 있었는데 어떻게 부딪혔는지가 미스터리로 남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바닥 화살표와 표지가 보이도록 넓게 찍은 사진 한 장, 상대 차가 후진 중이었는지 보여 주는 영상 몇 초가 말 열 마디보다 힘이 셉니다. 사고 위치와 충격 부위, 도로와 날씨 상태, 목격자 진술은 어느 유형이든 공통으로 함께 고려됩니다.
현장 사진과 차량 파손 부위 사진은 어느 차가 어느 방향에서 부딪혔는지를 보여 주고, 블랙박스 영상은 그 자체로 강한 증거가 됩니다. 영상은 편집한 사본만 남기지 마시고 원본 파일을 그대로 보관해 두세요. 경찰이 현장에 오지 않았다면 사고 후 28일 안에 신고하고 사건 번호를 보험사에 내도록 되어 있고, 번호가 없으면 보험사가 목격자 진술이나 퇴원 요약, CCTV 영상 같은 자료를 요구하는데, 이렇게 모은 자료는 과실을 다툴 때도 그대로 쓰입니다. 보험사가 비율을 제시하면 어떤 사실과 자료를 근거로 했는지 물어보셔도 됩니다.
보험사 판단에 동의하지 않으신다면
상담 중 흔히 듣는 질문이 바로 "보험사가 그렇다는데 제가 뭘 어떻게 다퉈요?"입니다. 보험사가 전화로 한 과실 이야기는 첫 의견일 뿐 마지막 결정이 아닙니다. 동의하지 않으시면 보험사에 내부 재검토(internal review)를 요청하실 수 있고, 보험사는 접수 후 14일 안에 결과를 알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다만 재검토 중에도 원래 결정의 효력은 그대로 유지되니, 그동안 급여가 어떻게 바뀌는지 적어 두시면 좋습니다. 본인 과실이 61%를 넘는지에 대한 다툼은 PIC로 가져갈 수 있고, PIC 절차는 무료입니다. 통화로 들은 과실 이야기는 날짜와 함께 메모해 두시고, 결정 이유는 서면으로 달라고 해 두시면 나중에 도움이 됩니다.
사고 직후에는 "내가 좀 더 조심했으면" 하는 마음에 스스로 잘못을 크게 생각하시기 쉬운데요, 그 착한 마음이 보험사 서류에서는 불리하게 쓰일 수도 있습니다. 호주의 도로 위에서는 늘 안전하시길 바라지만, 혹시 과실 이야기를 들으셨다면 혼자 받아들이기 전에 현장 사진과 블랙박스 영상, 보험사와 주고받은 이메일을 저에게 보내 주세요. 그 판단이 어떤 근거로 나왔는지, 다퉈 볼 여지가 있는지부터 함께 보겠습니다. 한국어로 편하게 연락 주세요.
자주 묻는 질문
쌍방 과실이면 CTP 배상을 못 받나요?
받을 수 있습니다. NSW 법정 급여는 과실과 관계없이 지급됩니다(MAIA s 3.1). 다만 본인 과실이 전적 또는 대부분(61% 초과)이면 소득 지원과 치료비가 사고 후 52주까지이고(s 3.11, 3.28), 52주 이후 소득 지원은 과실 비율만큼 줄어듭니다(s 3.38(1)). 과실 다툼이 있더라도 청구는 기한 안에 먼저 해 두세요(s 6.13).
보험사가 제 과실이 크다고 하는데 어떻게 다투나요?
보험사에 내부 재검토를 요청하시면 14일 안에 결과를 받습니다(MAIA s 7.9(4)). 과실이 61%를 넘는지는 PIC 기타 평가 대상이고(Sch 2 cl 3), 과실 비율은 합의나 PIC가 정합니다(s 3.38(3)). 재검토를 요청해도 원래 결정은 그대로 효력이 있으니(s 7.9(7)) 그동안의 급여 변화도 기록해 두세요. 현장 사진·블랙박스·목격자 진술을 먼저 모아 두시면 좋습니다.
안전벨트를 안 했으면 배상이 줄어드나요?
성인이 안전벨트를 매지 않았다면 법이 과실을 인정하도록 정하고 있습니다(MAIA s 3.38(2)). 이 과실은 52주 이후 소득 지원 감액에 반영되고, 손해배상에서도 같은 사유가 적용됩니다(s 4.17(2)). 구체적인 비율은 합의 또는 PIC가 정합니다(s 3.38(3)). 헬멧 미착용도 같은 방식으로 다뤄집니다(s 3.38(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