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개인상해 전문 로펌 리틀즈의 이려진 변호사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운동하다 다치신 분들이 가장 많이 발목 잡히는 서류 한 장, 헬스장이나 스포츠 클럽에 가입할 때 서명하는 면책 동의서(Liability Waiver)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새해 결심과 함께 헬스장에 등록하시면 프런트 직원이 태블릿을 내밀고, 우리는 화면을 끝까지 내리지도 않고 손가락으로 쓱 서명을 합니다. 거기에는 기구를 쓰다 다치든 수업 중에 사고가 나든 경기 중에 다치든 '시설은 책임지지 않는다'는 말이 빼곡히 적혀 있는데요, 막상 다치고 나면 그 몇 초짜리 서명이 이렇게 크게 다가옵니다.
"내가 동의한다고 사인했으니 할 말이 없지."
"운동하다 다친 건 원래 내 탓 아닌가?"
"트레이너한테 따지면 다음 PT 시간이 너무 어색할 텐데."
그리고 헬스장에서 다치면 아픈 것보다 창피한 게 먼저라, 다들 쳐다보는 가운데 괜찮은 척 털고 일어나 그대로 집에 가시는 분이 정말 많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아무 기록 없이 돌아서시는 것이 나중에 가장 아쉬운 대목이 됩니다. 많은 분들이 동의서 때문에 아예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고 믿고 포기하시지만, 호주 법은 그 믿음이 늘 옳지는 않다는 쪽입니다.
동의서가 덮어 주는 것과 덮어 주지 못하는 것
호주 법원은 면책 동의서가 그 운동 본래의 위험, 그러니까 내재적 위험(Inherent Risk)에 대해서는 유효할 수 있지만, 과실로 생긴 부상까지 면제해 주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운동을 하겠다고 하면서 위험을 스스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활동 자체의 위험에 동의한 것이지, 시설 관리자나 강사가 부주의해도 괜찮다고 허락한 것이 아니기 때문인데요, 법원은 동의서가 부상 위험을 구체적으로 적어 두었는지, 소비자가 그 내용을 실제로 이해하고 동의했는지를 따져 봅니다. 게다가 면책 조항이 불공정 계약 조건에 해당하면 Australian Consumer Law에 따라 무효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이클링을 하다 넘어지거나 축구를 하다 발목을 삐는 것은 그 운동 본래의 위험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설의 관리 불량, 장비 결함, 강사의 부적절한 지도는 내재적 위험이 아니라 관리 과실이고, 청구가 되느냐 마느냐는 대부분 이 선 어디에 서 있느냐로 갈립니다. 같은 발목 부상이라도 공을 다투다 삐끗했다면 운동의 위험이지만, 찢어진 매트 틈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면 관리의 문제가 되는 식인데요, 그래서 저는 상담할 때 '어디를 다치셨어요'보다 '무엇 때문에 넘어지셨어요'를 먼저 여쭤봅니다.
이런 경우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트레드밀 벨트가 끊어졌거나, 웨이트 기구 볼트가 풀려 있었거나, 닳아 버린 기구 패드 때문에 관절을 다치셨다면 이것은 시설의 관리 의무 위반입니다. 동의서에 서명하셨더라도 기구 결함은 운동의 위험이 아니라 관리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수영장 타일이 젖어 미끄러운데 경고 표지 하나 없었다면 이것도 시설이 방문자의 안전을 챙기지 않은 것이고, 공공 수영장이든 헬스 클럽 수영장이든 스포츠 센터 샤워실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사람 때문에 다치는 경우도 있는데요, 요가 강사가 동작을 잘못 교정해서 척추를 다치셨거나, 퍼스널 트레이너가 몸 상태는 보지도 않고 무리한 훈련을 밀어붙여 다치셨다면 전문 지도자로서의 주의 의무를 어긴 것이고, 이때는 강사 개인뿐 아니라 그 강사를 고용한 시설도 대위 책임(Vicarious Liability)을 질 수 있습니다. 풋볼, 농구, 럭비 같은 팀 경기에서는 규칙 안에서의 몸싸움은 운동의 일부로 보지만, 다른 선수가 지나치게 난폭하게 굴거나 규칙을 심각하게 어겨 다치셨다면 그 사람에게 직접 청구할 수 있습니다. 암벽 등반이나 스카이다이빙, 번지점프 같은 익스트림 스포츠도 운동 자체의 위험에는 동의하셨더라도, 안전 장비에 결함이 있거나 제대로 점검되지 않았다면 그건 별개의 과실입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위험에 동의하셨다고 해서 낡은 줄을 쓰는 업체까지 믿어 주겠다고 하신 것은 아니니까요.
다친 그날 해 두시면 좋은 것
상담 중 흔히 듣는 질문이 바로 "클럽 경기 중에 다쳤는데 클럽에도 청구할 수 있나요?"인데요, 스포츠 협회나 클럽 활동 중 다치셨다면 그 조직이 가입한 공공책임보험을 통해 청구할 수 있고, 호주의 등록 스포츠 클럽은 대부분 이 보험 가입이 의무로 되어 있습니다. 동네 클럽 경기라 보험 같은 건 없을 거라고 지레짐작하고 넘기시는 경우가 많은데요, 클럽 사무국에 어떤 보험에 들어 있는지 한 번 여쭤보시면 길이 보이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개인이 운영하는 시설이 아니라 협회나 클럽 행사였다면 그 점부터 기억해 두세요.
그러니 창피하시더라도 그 자리에서 몇 가지만 챙겨 주세요. 결함 있는 기구나 젖은 바닥, 경고 표지가 없던 자리를 스마트폰으로 바로 찍어 두시고, 직원에게 사고 보고서(Incident Report)를 써 달라고 해서 사본을 받아 두시며, 지켜본 분들의 연락처도 받아 두세요. 병원이나 GP에는 가능한 한 빨리 가셔서 부상 기록을 남기시고, 날짜와 시간, 상황, 목격자 정보를 그날 바로 적어 두시면 좋습니다. 기구 유지·보수 기록은 법적 절차가 시작되면 제출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공공책임 청구의 시효는 일반적으로 사고일부터 3년이고 주마다 조금씩 다른데, 시간이 지날수록 증거는 사라지고 목격자의 기억도 흐려집니다. 동의서에 서명하셨다는 이유만으로 미리 포기하지 마시고, 청구할 수 있는지부터 먼저 확인해 보시는 것이 순서입니다. 특히 트레이너와의 관계가 어색해질까 망설여지신다면, 다친 몸으로 계속 그 수업에 나가시는 것이 더 어색한 일이라는 점도 한 번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운동은 몸을 위해 하는 것이니, 여러분의 운동이 다치는 일 없이 건강한 습관으로만 남기를 바랍니다. 혹시 운동하다 다치셨다면 서명하신 동의서와 사고 현장 사진, 병원 기록을 보내 주세요. 그 부상이 동의서가 덮는 위험인지, 시설이나 강사의 과실로 볼 수 있는지부터 한국어로 짚어 드리겠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헬스장 트레드밀 고장으로 다쳤는데 가입할 때 서명한 동의서 때문에 배상 못 받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트레드밀 벨트가 끊어지거나 기구 볼트가 풀려 있는 등 기구 결함은 스포츠 본래의 내재적 위험이 아니라 시설 관리자의 관리 의무 위반입니다. 면책 동의서는 내재적 위험에는 유효할 수 있지만 과실로 인한 부상까지 면제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면책 조항이 불공정 계약 조건에 해당하면 호주 소비자법에 따라 무효가 될 수도 있습니다. 결함 기구를 바로 촬영하고 사고 보고서 사본을 받아 두세요.
PT 받다가 트레이너가 무리하게 시켜서 허리 다쳤는데 누구한테 청구하나요?
트레이너 개인과 트레이너를 고용한 시설 모두 청구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퍼스널 트레이너가 신체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과도한 훈련을 강요해 부상을 입혔다면 전문 지도자로서의 주의 의무 위반에 해당합니다. 이 경우 시설도 대위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요가 강사의 잘못된 동작 교정으로 척추를 다친 경우도 같습니다. 가능한 한 빨리 병원이나 GP를 방문해 부상 기록을 남기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축구 클럽 경기 중에 다쳤는데 클럽에 배상 청구할 수 있나요?
경우에 따라 다릅니다. 규칙 내에서의 신체 접촉으로 다쳤다면 스포츠 본래의 내재적 위험으로 간주돼 청구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참가자가 지나치게 난폭하거나 규칙을 심각하게 위반한 행동으로 부상을 입혔다면 그 개인에게 직접 청구할 수 있습니다. 스포츠 협회나 클럽 활동 중 부상은 해당 조직이 가입한 공공책임보험을 통해 청구할 수 있으며, 호주 대부분의 등록 스포츠 클럽은 공공책임보험 가입이 의무입니다.
